동구에 오면 관광愛 물들어요

도심 속 동구의

정월대보름 민속행사
도시화의 물결에 밀려 농촌의 정취가 점차 사라져가는 지금의 동구.

그곳에서 고향을 지키며 살아가는 사람들 또한 그 모습이나 생활양식이 도시화되기는 마찬가지이지만, 마을에 대대로 전해오는 세시풍속은 변함없이 계승되고 있다. 정월대보름에 펼쳐지는 민속행사가 그것. 정월은 한 해 동안 이루어야 할 일을 계획하고, 기원하며, 점쳐보는 달로써 우리민족에게는 중요한 달이다.

여기에 일 년 중 가장 큰 보름으로 여기는 정월대보름은 풍요를 상징하며 공동체의 명절이 되는 날이기도 하다.
동구는 이즈음 민속축제 한마당이 떠들썩하게 열리는 시기이다.

정월대보름을 즈음하여 펼쳐지는 동구의 민속행사는 세천동에서 열리는 대청호반정월대보름제를 비롯하여 산내동의 산내공주말디딜방아뱅이, 이사동의 달집태우기, 비룡동의 장승제, 용운동의 탑제, 소제동의 당산제 등 민속신앙의 대상 또한 다종 다양하며 볼거리도 풍부하다. 특히 산내디딜방아뱅이는 1999년에 제주도에서 개최된 전국민속경연대회에 대전광역시 대표로 나가 입상한 바 있는 민속행사로 눈여겨볼만하다.

산내공주말디딜방아뱅이

산내공주말디딜방아뱅이 놀이 사진1

산내공주말디딜방아뱅이는 산내지역 정월대보름 거리제에서 마을 사람의 무병장수와 안녕을 기원하는 제의와 놀이로 전염병이 발생하면 절기에 상관없이 행해진 놀이다. 이 놀이는 전염병이 돌게 되면 산내 공주말의 부녀자들이 중심이 되어 날을 잡는다. 그런 다음 빈 상여를 마련하여 밤에 이웃마을로 가서 디딜방아를 훔쳐와 마을 어귀나 길목에 거꾸로 세워놓고 제의식을 치른다.

훔쳐온 디딜방아를 세워놓은 곳
주변에 금줄을 치고 디딜방아 가랑이에 되도록 지저분한 여인의 속옷을 걸친 다음 팥죽을 뿌리거나 붉은색 황초 칠을 하고 제의식을 치르는 디딜방아뱅이를 하고 나면 돌림병이 마을로 들어오지 못한다고 믿었으며, 이미 들어 온 홍역이나 마마는 곧장 물러간다고 믿었다.

재미있는 것은 디딜방아뱅이가 전해 내려오고 있는 공주말에서 훔쳐야 할 디딜방아는 물 건너 덕산, 송촌, 소룡골 등지에 있는 이웃마을 디딜방아인데, 이 마을들의 방앗간에서는 도둑맞을 것을 대비하여 늘 여벌의 방아를 준비해 놓고 방아를 훔쳐 가도 묵인해 주었다는 것이다. 야심한 밤에 빈 상여 매고 숨어들어와 떠들썩하게 요랑 소리 내며 디딜방아를 훔쳐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재미 또한 그 마을 사람들이 누리지 않았을까.

디딜방아뱅이는 ‘산내동 정월대보름 한마당축제’의 프로그램 중 하나로 축제 당일 전래민속 재연행사로 치러진다. 20명의 남녀가 디딜방아를 거꾸로 세워 실은 상여를 같이 메고 요랑잡이에 이끌려 마을로 돌아가는 모습을 재연한 이 민속놀이는, 만장을 앞세우고 행사장을 출발하여 마을을 돈 다음 다시 행사장으로 돌아오는 순으로 이어진다. 그런 다음 마을 어귀의 고목을 재현해 놓은 곳에 금줄을 치고 방아를 거꾸로 세워 놓는다. 그 다음으로 제상을 차려 제를 지내고 마을사람들은 디딜방아 주변에 모여 소지를 올리면서 소원이 이루어지기를 기원한다.

디딜방아뱅이 전후로 펼쳐지는 놀이로 윷놀이와 여성 팔씨름, 투호놀이, 노래자랑, 달불놀이 등과 함께 각설이 공연도 진행되는 이 축제는 전통과 현대를 아우르는 복합문화의 장이기도 하다.

헤어진 이웃 다시 만나는 대청호반정월대보름행사

  • 대청호반정월대보름행사 사진1
  • 대청호반정월대보름행사 사진2

금강이 여울져 흐르는 아름다운 강마을. 그곳에서 대대로 정을 나누며 이웃과 함께 살았던 사람들은 고향을 등질 수밖에 없었다. 1980년 12월 완공된 대청호 건설로 인하여 완전히 물에 잠긴 내탑동을 비롯하여 17개 마을은 물에 잠겼고 마을사람들은 속절없이 이웃과 헤어질 수밖에 없었다. 성동, 주산동, 추동, 마산동, 효평동, 직동 등의 마을이 호수의 동쪽 언덕으로 올라가 자리 잡았고 비룡동, 신상동, 주천동, 세천동, 신하동, 오동 신촌동 등의 마을이 호수의 서쪽 언덕으로 올라가 자리 잡으니, 한 고장을 이루었던 마을들은 대청호를 사이에 두고 양분되게 되었다.

면소재지를 중심으로 한 가족처럼 지내던 마을사람들은 호수를 사이에 두고 멀리 떨어져 있다 보니, 자주 만나지도 못하고 떨어져 지내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 서로의 마음은 점차 멀어져 다른 고장 사람이 되가는 것 같아 안타까웠다. 수몰에 도시로 떠난 사람 또한 예전의 고향이 그립기는 마찬가지. 마을사람들은 뜻을 모아 예전처럼 사이좋은 이웃으로 지내기를 바랐다. 이러한 마을사람들의 뜻에 따라 17개 마을을 한 동으로 묶어 한 개의 행정동이 탄생 한 것이 대청동이다. 17개 마을은 통으로 분류하여 한 고장 사람이라는 동질성을 다시 찾게 되었으니 경사스럽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동 이름만 합쳤다 해서 사람들의 마음이 예전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1998년 대청동 주민센터가 개설되고부터 추진 한 것은 외지로 나간 사람들과 온 마을사람들이 한 장소에 모두모여 정을 나누며 화합의 장을 마련하자는 것. 동 통합 3년만에 대청동 주민과 출향주민 모두가 모이는 장을 마련됐다.

2001년 정월. 정월대보름을 기하여 제1회 대청호반 정월대보름 행사를 치른 지 올해(2010)로 9회 째를 맞고 있는 이 행사는 정월대보름 즈음하여 매년 행사를 치른다. 예로부터 정월대보름은 마을 공동체가 공동의 안녕과 행복을 비는 화합의 장이기도 했던 터. 이날만큼은 대청동 주민 모두가 한자리에 모여 우리 고유의 세시풍속을 즐기면서, 마을의 안녕과 행복을 빌어주며 하루를 보낸다. 유가식으로 마을의 무사평안을 비는 제를 지내고 불가식으로 마을의 화합을 비는 용왕제를, 불꽃을 쏘아 달집을 태우고 ‘소원성취달불놀이’ 구조물에 둥근 달 모양의 짚 덩이를 달아 불태우는 달불놀이는 이색적이기까지 하다. 풍선에 주민 각자의 소지를 달아 날리는 소망의 풍선 날리기는 우리의 전통문화를 현대화 한 소지올리기. 천여 개의 풍선이 일제히 주민들의 소망을 품고 하늘로 날아오르는 광경 또한 이색적이기는 마찬가지다.

사물놀이와 바라춤, 살풀이춤, 전통춤 등의 무대공연은 민요, 가요, 각설이공연으로 이어지고 연이어 대청동의 17개 통을 통합하여 8개 팀으로 나누어 진행되는 토너먼트식 윷놀이가 끝나면 17개 통 주민 대표들이 노래경연을 펼친다.

모든 액운 달집에 불태우고 소원 달아 훨훨

중구 옥계동에서 학고개를 넘어가면 도심의 풍경은 간데없고 시골정취 물씬 풍기는 마을로 접어들게 된다. 보문산 남동쪽 자락에 자리 잡은 이 마을은 이사리. 상사리와 하사리 두 마을이 있다 하여 이사리다. 이 마을은 380년 된 마을로 우암송시열의 후손들이 모여 살아가는 집성촌이 자리 잡고 있기도 하다.
모두 170호의 가구가 모여살고 있는 이 마을은 도심에 접해 있어서 직장인가구와 농업인가구가 반반이다. 이 마을에서 농사짓는 사람들의 주 작목은 벼, 포도, 인삼 등으로 토박이 70여 호의 원주민 가구가 주로 농사지으며 옛날과 변함없이 농경생활을 하고 있는 평화로운 마을이다.

마을의 남쪽으로 달봉(약 150m)이라는 작은 봉우리가 솟아있는 이 마을은 매년 음력 1월 14일 정월대보름이면 달봉에 올라가 생솔가지를 쌓아놓고 달집태우기를 했던 마을이다. 달집태우기를 할 때 생솔가지를 쓰는 이유는 생솔가지를 태우면 연기가 많이 나서 달을 끄스를 수 있다는 믿음에서다. 달을 끄스르게 되면 온갖 재액도 물리치고 마을의 안녕과 행복이 온다는 믿음과 함께 예전에는 산신제와 장승제도 함께 지냈던 이 마을은 현재 마을에 전래되는 민속놀이로 달집태우기 행사만 남아 있다.

  • 달집태우기 사진1
  • 달집태우기 사진2

정월대보름. 마을사람들이 모여 달집을 세운 뒤 달집에 소지를 단다. 올 한해 꼭 이루어졌으면 하는 소망을 적어 넣은 소지는 행사장에 사람 수가 불어날수록 많은 소지가 달집에 달리고 빙 둘러 빼곡히 차지할 무렵이면 풍물단이 달집 주변에 모인다.

종일토록 잡신을 눌러 마을과 각 가정의 무사태평과 풍년을 기원하는 지신밟기를 하고 온 풍물단이 달집주위로 모여들어 한바탕 놀고 난 뒤의 어스름 녘. 휘영청 보름달이 뜰 시간이 되면 마을사람들이 삼삼오오 제상 주위로 모여 제를 올리기 시작한다. 마을의 평안과 풍년을 기원하고, 모든 부정한 것은 불에 타 액운이 없어지기를 바라면서...
제사가 끝나면 달집에 불이 놓아지고 달집의 몸체로 쌓아놓은 대나무가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거세게 타오른다. 이때 달집 주변에 서있는 주민들은 부정하고 더러운 모든 것들이 불에 타 액운이 제거되고 마을에 평안이 오기를, 자신의 소원이 이루어지기를 빈다.

이사동에서는 예전, 생솔가지를 썼지만 지금은 대나무만 사용하여 달집을 세운다. 이사동 주변의 숲은 시에서 지정한 생태 보호림으로 생솔가지를 꺽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순전히 대나무만으로 달집을 세우게 되었다는데, 달집이 타면서 나는 대나무 마디 터지는 소리가 매우 통쾌하고 맑아 좋다는 것이 마을사람들의 생각이다. 달집태우기가 끝나고 나면 마을사람들은 한데 어우러져 준비된 음식과 술을 나누어 먹으며 흥겹게 논다.

비룡동 줄골 돌장승

오랫동안 농경생활을 하여온 우리민족, 지금처럼 과학ㆍ기계기술이 발달하지 않았던 근대시대 까지만 하더라도 한해 농사는 오로지 하늘에 맡겨야 했다. 옛날에 우리 조상들은 모두 소처럼 열심히 일하면서 하늘이 도와주기를 빌고 또 빌었다. 홍수를 막아달라고 수살막이제를 지내는가 하면, 비를 내려달라고 기우제를 지내기도 하였다. 언덕을 따라 시루떡 쌓듯, 층층이 개간한 다랭이논을 두고 "천수답"이라 한 것도, 하늘에서 비를 내려주지 않으면 사람의 힘으로는 당해낼 수 없는 산골의 농경생활이었기 때문에 유래된 말이다.

  • 돌장승 사진1
  • 돌장승 사진2

마을은 어땠을까? 마을을 이루는 각 가정의 삶부터 마을 전체를 아우르는 공동체의 삶 속에서 질병이나 죽음, 재난 등 갖가지 흉사는 어느 곳이건 있게 마련이다. 마을신앙을 받아들여 두려움의 존재로부터 가족과 마을을 보호하기에 이른다. 이러한 마을 공동체의 신앙은 선사시대 때부터 그 유래를 찾을 수 있는 가장 원초적 신앙의 형태로 보편적 우리 민속신앙으로 자리 잡는다.

  • 돌장승 사진3
  • 돌장승 사진4

산내 공주의 디딜방아뱅이, 대청호반정월대보름행사, 이사리의 달집태우기 등 민속신앙의 대상은 다종다양하다. 또한 그 속에 동구의 마을마다 그 마을만의 독특한 문화가 녹아들어 있어 같은 류 이면서도 다양한 문화를 전개하고 있다.

대전시 동구 비룡동의 한 마을 줄골에서는 돌장승제를 해마다 지내며 마을과 마을사람들의 안녕을 빌고 있다. 세천고개에서 대청호가는 길로 들어서면 만나게 되는 첫마을 줄골은 대전 동구의 산, 계족산의 최남단 자락에 위치하고 있는 평화로운 산골이다.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마을의 중심에 도로가 나고 이 길로 대중교통이 왕래하면서 산골티는 많이 벗었지만 주변이 적막하니 여전히 산골은 산골이다.

이 마을어귀에서 오래전부터 마을을 지켜온 터줏대감 두기의 돌장승이 길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며 서있다. 마을사람들은 선조들이 그랬듯이 해마다 돌장승에 제를 올리며 정성을 들이고 있는 것. 마을 어귀에서 주위를 둘러보면 어른 두길 정도의 높이에 서 있는 장승을 발견하게 된다. 이 두기의 돌장승은 천하대장군과 지하대장군. 남장승과 여장승이다. 두 장승은 왼새끼꼬기로 만든 줄을 걸치고 거기에 커다란 짚풀바구니를 달고 있는데, 바구니는 제를 지내고 나서 음식을 바친다는 뜻을 의미한다.
오래도록 돌장승제를 이어왔다고 하니 그 오랜 세월 동안 변치 않았던 것은 마을의 정서(情緖)일 터. 돌장승의 모습은 곧 마을의 표정이 아닐까 한다. 400년 전통을 이어 온 공주 탄천의 소라실장승제의 예에서 보면 장승의 표정은 붓을 들고 그리는 사람과 주위에서 참견하는 마을사람들에 의하여 달라진다.

전체적으로 문인석의 모양을 하고 있는 이 마을 돌장승의 표정도 예외가 아니다. 표정이 볼만하다. 얼굴 가득 미소가 번지는 온화한 표정의 여장승과 엄한표정 속에서 살짝 미소가 번지는 남장승의 얼굴을 보노라면 너무도 순박해보여서 보는이로 하여금 입가에 절로 미소가 떠오르게 한다. 본래 장승의 표정은 마을사람들을 닮는 법. 계족산의 최남단 양지바른 산자락에 기대어 사는 줄골 사람들의 순박함을 읽을 수 있다.

지하대장군의 단 아래 세워진 안내판에 줄골 돌장승의 유래와 장승제에 대해서 소개되는 바, 그 전문을 인용·소개한다. "줄골 마을회관 남쪽, 대청호수길 양쪽에 있으며 천하대장군과 지하대장군의 돌장승 2기가 마주 서 있다. 남장승은 높이가 2m 정도로 장승에 천하대장군이라 새겼고 서쪽을 향해 서 있으며, 여장승은 높이 1.7m 정도로 장승에 지하대장군이라 새겼으며 동쪽을 바라보고 있다.
10여년 전만해도 두 장승은 2.5m 간격을 두고 서 있었는데 대전과 추동을 연결하는 도로를 확장하면서 여장승을 뒤로 물려 지금은 10m의 간격을 두고 있다. 이 장승의 외형은 전형적인 문관석 형이다. 길쭉한 화강암 기둥의 상부에 사람의 얼굴울 새겼다.

줄골에서는 음력 정월보름 전날이면 약 200여년 전부터 해마다 장승제를 지내는데 마을사람이 모두 참여하여 풍물을 치면서 4번 돌고 5번째는 제당으로 가서 제향을 올린다. 그리고 제례 후 장승에게 음식을 바친다는 뜻으로 짚으로 엮은 주머니에 떡, 과일 등 음식을 넣는다. 또한 이곳은 장승이 있는 곳이라는 뜻으로 장승배기라고도 한다."

  • 자료관리 담당부서
  • 관광문화체육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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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2020-0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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